교사, 삶에서 나를 만나다(김태현 지음/ 에듀니티)
2016.08.
4년만에 나온 김태현 선생님의 신간.
존경하는 김태현 선생님의 책이기에 당연히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가
수업코칭연구소 회원들에게 '친필싸인'과 함께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몇년동안
수많은 수업을 들여다보고
수많은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좋은 수업의 틀과 기준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생님들의 아픔과 무너진 모습들을 마주하게 된 김태현 선생님이
조용히 말을 걸어오신다.
좋은 수업, 좋은 학급, 좋은 선생님이 되려
안간힘을 쓰는 것도 좋지만
잠깐 여기 앉아보라고.
앉아서
숨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나'를 한번 살펴주라고.
나는 30대가 되면 무엇인가 바뀔 줄 알았다.
아이 둘을 낳고, 30대가 되고 교실에 다시 돌아오면서
교실에 들어가는 발걸음이 더 두렵고 무겁다.
좋은 수업을 하는 교사가 되기 위해
계속해서 연수를 찾아듣고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분명히 나는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고 애쓰고 있는데
수업을 준비하고 하는 것은, 아이들이 있는 교실에 들어가는 것은 더더 두려워지고 힘들기만 하다.
객관적인 조건을 생각했을 때는 힘들만한 조건은 아니다.
학생수는 더 줄어들었으며 성향도 순한 편이다.
학급아이들 중 큰 문제가 되는 학생들도 없으며
수업을 하는 학생들 역시 내 말을 잘 들어주고 존중해준다.
그런데도 나는 수업을 하는 것이 힘들다.
며칠동안은 배부른 투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나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이렇게 준비없이 교실에 들어가니까 힘든 것이지.
계속해서 미루기만 하니까 아이들 곁에 가기가 부담스러운 것이지.
다시한번 김태현 선생님의 잔잔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지친 나를 다독이며 찬찬히 읽어봐야겠다:D
구입처링크: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85992259&orderClick=LAG&Kc=p.39) 느림이란 더 빠른 박자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느림은 시간으 성급히 다루지 않겠다는 의지, 시간에 쫓겨 허둥대며 살지 않겠다는 의지, 세상을 넉넉하게 받아들이며 인생길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능력을 키워가겠다는 의지의 확인이다.(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p.51) 어쩌면 우리 교사는 갈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늘 하는 수업도, 늘 눈물을 흘리며 아파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꾸만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고목이기를 꿈꾼다면 그것은 허상이다. 진정한 수업 변화를 꿈꾸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있는 이곳이 어떤 곳임을 정확하게 인지해야 한다. 그 출발점을 정확히 해야 긴 시간 동안 수업 변화를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다. 그렇지 않고 환상을 품고 잘못된 출발점에 서 있으면, 변화의 길을 걸으면서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인정하지 못하고 길을 가다가 곧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길을 떠나면, 설사 쓰러지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오더라도 원래 이 길이 이런 것이라고 수용하게 된다.
p.125) 무기력에 빠져 있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이끌려 자신의 삶에 대한 미래를 잃어버린 것이다. 스스로 삶의 의미를 포기한 것이다. 무기력 속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스스로 '나는 가치없는 존재이다'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심한 무기력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것은 내 삶에 오히려 큰 뿌리를 만들고, 새로 일어설 힘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p.130) 사실 교사들은 학교에 있을 때는 외로움을 잘 느끼지 못한다. 학생들과 같이 있고,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갈 때는 쓸쓸하다. 차창에 비친 모습이 왜 그렇게 불쌍해 보이는지,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외롭고 쓸쓸하다. 늘 혼자 있는 느낌이다. 분명 좋은 공동체, 좋은 사람들 속에 있지만, 왜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지, 순간순간 행복감에 젖어드는데도, 가끔 터져 나오는 외로움에 스스로 지쳐갈 때가 있다. 그래서 갈망한다. 누군가 나를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기를 말이다. 항상 모든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이해받기를 원한다.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음을, 혹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음을 말이다. 하지만 정말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말 한마디를 듣고 싶을 때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남편도, 아내도, 이성친구도, 동료 교사도, 친구들도 이상하게도 내가 외로움 속에 지쳐 있을 때,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p.141) 수업의 변화는 내가 나를 바로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수업을 변화시키기 이전에 내 삶부터 가꾸고 나를 사랑해야 한다. 내 삶에 뿌리를 잘 내리고 완벽주의, 무기력, 외로움의 감정을 잘 마주하고 있어야 수업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힘이 나올 것이다. 지금 문 앞에 서 있는 나, 진짜 나를 반갑게 맞이해 보자.
p.150) 나는 늘 고민한다. '교사가 수업하는 것과 일반인이 수업하는 것의 차이', '입시 학원의 수업과 학교 수업의 질적인 차이', '앞으로 다가올 인공지능의 수업과 교사 수업의 차이'를 말이다. 사실 이 차이는 수업을 진행하는 기술과 방법으로 답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진행 기술은 학교가 아닌 곳이 더 나을 수 있다. 유명 학원 강사들의 카리스마나 흡입력은 대단하다. 적절한 유머, 핵심을 잡아내는 요약 능력, 정교한 질문 등 강의의 외적 기술은 오히려 학교가 더 뒤처질지도 모른다.
p.154) '재미'있는 수업, '소통'이 있는 수업, '감동'이 있는 수업, 이렇게 모호하게 목적을 설정하지 말고, 더 깊이 내적으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재미'가 무엇인지, '소통'은 무엇인지 그리고 '감동'은 무엇인지를 자신의 언어로, 내 가슴 속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실제 수업에서 구현해내야 한다.
p.156) 수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있을 때, 그것이 하나의 기준점이 되어서 수업 내용이 변형되고, 교과서를 재구성하면서 나만의 메시지가 전달된다. 내 수업의 진짜 변화는 남의 수업을 흉내 내는 것에 있지 않고, 내가 무슨 생각으로 수업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나만의 수업 속 주제의식을 찾아야 할 때다.
p.167) 교사는 지적인 정보를 이야기하고 구조화시키는 것은 매우 능숙하다. 그런데 정작 내 생각을 말하는 것에는 서툴다. 윌 헌팅처럼 객관화된 지식을 말하는 것은 매우 잘하지만, 수업에 대한 나만의 주제 의식을 말하기는 무척 어렵다. '내가 왜 수업을 하는지', '내 수업으로 일 년 동안 학생들에게 어떤 배움을 주고 싶은지' 말하라고 하면, 무척 당황스럽다. 그리고 그 질문으로부터 회피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럴수록 우리는 내 삶에 말을 걸어야 한다. 내 삶으로 들어가 내 행위에 말을 걸어야 한다. 외부의 사건이 아닌 내면으로 들어가 내가 교사의 삶을 선택했던, 그 이유를 들어야 한다. 내가 지금 가르치는 행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내 과거의 경험으로 들어가 들어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나 자신이 누구인지, 나는 어떤 모습으로 수업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답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로 세워질 수 없다.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걷는 현재의 위치와 앞으로 걸어갈 길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내가 남의 지식에만 능통하다면, 나는 현실에 있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교실에 수도 없이 들어가면서 내가 아닌 외부의 세계에 대해서 기계적으로 옮기기만 한다면, 늘 공허해진다. 그리고 수업에서 지쳐간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내가 걸어왔던 삶을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이것은 어떤 고상한 철학자들만이 하는 행위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스승이 되고자 하는 교사라면, 내 삶에 대해서 정직하게 대면하고, 내 가르침의 행위에 대한 분명한 의미와 가치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p.198) 그런데 우리는 배움 중심 수업을 이야기하지만, 의외로 교사 스스로가 배움의 기쁨을 경험하는 경우가 드물다. 내 삶을 싸그락 싸그락 두드리면서 기쁨의 경험을 찾아 수업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데, 대신에 최신의 교수 기술과 재미난 영상 자료로 이것을 극복하려고 한다. 수업 시간에 우리가 학생들에게 주려는 기쁨은 한순간에 시선을 끄는 몰입감이 아니다. 교과 지식을 통해서 나와 만나고, 너와 대화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지성과 감성이 통합되는 기쁨이다. 이것은 수업의 기술만으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일 년의 수업을 통해 천천히 오는 기쁨이다. 교사가 경험한 기쁨이 수업 속에 자연스럽게 녹고, 계속해서 그런 기쁨의 삶을 교사가 도전하려고 할 때, 그 속에서 학생들을 향한 수업의 주제의식이 생기고 이를 통해 우리는 학생들을 깊은 배움의 장으로 초대할 수 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경험했던 혹은 경험하고 있는 기쁨이 무엇이냐고, 그리고 그 기쁨을 학생들에게 잘 전해주기 위해서 나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배움으로 학생들을 초대하기에 앞서서, 조용히 내 삶으로 나를 초대해보자. 내가 먼저 기쁨을 경험하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 주제의식은 내 기쁨의 삶 속에 있다.
p.220) 수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가치와 의미가 주제의식이라면, 그 주제의식을 잘 구현하기 위해 교사가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것들이 신념이다. 주제의식이 머릿속의 관념이라면, 신념은 삶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실천이다. 주제의식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라면, 신념은 내가 직접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수업의 주제의식을 찾은 교사는 그 주제를 구현하기 위한 자신의 신념을 잘 세울 필요가 있다. 자칫 주제의식만 잘 세워놓고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입만 번지르르한 교사가 될 수 있다. 생각과 행동이 일치되도록 주제의식을 잘 구현하기 위한 자신의 신념을 구체적으로 찾아야 한다.
p.230) 이미 우리는 창의적인 삶을 살고 있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다만 그 능력이 자기에게 없다고 느끼고 사용하지 않을 뿐, 누구나 다 기존 지식을 바탕으로 기발한 생각을 낼 수 있다. 사실 창의성의 시작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참신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사고를 할 '주체성'에 있다. 창의적인 삶을 산다고 했을 때 가장 중요한 생각은 나라는 존재가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p.331) 수업을 본다는 것도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무기력한 학생들과 분투하며 의미 있는 배움을 만들어가는 수업자의 모습에서 그 교사의 꿈을 읽는다. 혹은 좌절하는 모습 속에서 그의 아픔을 이해한다. 그럴 때, 수업 이야기를 하면서 '환대'의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수업자는 위로를 느낀다. '이 사람이 내 수업으로 나를 봐주고 있구나!', '내 삶을 이해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수업자가 힘든 수업을 다시 헤쳐 갈 내적인 힘을 준다. 이것은 수업을 통해 그 사람의 삶을 방문하고 수업자를 의미 있는 '존재'로 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존재로 수업을 본다는 것은 수업하는 교사의 모습 그 자체를 '존귀'한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의 수업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교사를 배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 자신의 꿈을 가지고 수업을 하는 '신념'의 존재, 수업에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려는 '작가'의 존재, 수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 가슴 아파하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는 존재, 고민을 말하고 위로받고 싶은 '외로운' 존재로 보는 것을 말한다.
최근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