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송인수/IVP)
2018.8.
기독교사대회에서 업어온 책. 설교집은 사 본 적이 없....는데^^;; 저녁집회 가다가 부스 앞에 서계시는 송인수 선생님을 보고 바인더를 뒤져서ㅡ하필 지갑도 두고왔네!ㅡ갠신히 비상금을 찾아 구입했지요.
성경 속 여러 만남들에 대해, 그리고 송인수 선생님의 삶에 중요한 지점이 되었던 몇몇 말씀들을 함께 나누는데 송인수 선생님의 음성으로 들렸다.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그분이 걸어가시는 삶의 모습들을 멀리서나마 바라보면서 어떻게 저런 선택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했는데 그 원동력이 어디에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다시 구절들을 옮겨적으면서도 또 감동. 그 고백대로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힘이 있는지. 한 구절 구절이 송인수 선생님의 목소리로 다가와 마음을 울린다.
p.14) 우리는 인생의 수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뜻밖에 찾아온 시련을 해석할 바법을 몰라 허둥댈 때, 뜻을 따라 살다가 태산과 같은 문제를 만날 때, 우리는 인생의 빛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없는 이들임을 깨닫습니다. 성경은 그 어둠을 헤쳐 나오라고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는 각자 성경을 읽고 해석함으로써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p.35) '선생'은 누구입니까? 알고 싶은 게 있을 때 필요한 대상이 선생입니다. 선생에게 여러 가르침을 받을 수는 있지만, 삶의 주도권은 여전히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독립된 존재인 한 사람이 같은 사람인 선생에게 자신의 삶 자체를 맡기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는 누구입니까? 삶의 주도권을 넘길 수 있는 존재입니다.
p.40) 예수님의 대산 나의 질문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내 인생의 선생이 아니라 주인이심을 알기 위해 내가 들어야할 답은 무엇입니까? 그 답을 찾기 위해 그물을 던지라는 말에 "네, 알겠습니다!"하고 그물을 던질 나만의 '깊은 데'는 어디입니까?
p.72) 어떻게 해야 신앙이 시작되고 자라납니까? 울타리 안에 있는 나 자신을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그 자리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아니, 나의 성채인 울타리를 불 지르고 오직 주님의 나라, 주님의 성이 넓어지는 것만 환영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시작되고 자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르심 앞에서 '이것만큼은 안됩니다'하는 생각으로 지켜 온 것들을 내려놓으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내려놓는 것을 넘어 종종 실제로 내려놓는 것으로 번져 갑니다.
p.83) 참된 용기를 가진 사람은 잃어도 되는 것은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은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 나라를 잃을까 봐 자신의 지위를 포기했습니다. 아니, 하나님 나라를 얻고 나서 지위를 내던져 버렸습니다.
p.102)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참다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참다운 예배는 무엇입니까? 죄 많은 사람이 어떻게 죄가 없는 선한 하나님께 그런 예배를 드릴 수 있나요? 허물 많은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까? 속죄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 참다운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먼저 주셔야 가능하고, 메시야를 보내 주셔야 가능합니다.
p.105) 하나님의 섭리에 우연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개와 같은 삶, 도무지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 이유와 맥락을 모르기에 우리는 '우연'이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내가 너를 안다"고 말씀하시며 그분을 향한 내 마음의 창문을 닦아 주시고 주님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p.124) 하나님을 아는 사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기적을 보고 그 기적에 빠지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끈기를 가지고 기도를 해서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들은 그 자체로 기뻐하는 것을 넘어서서 응답해 주신 분을 바라봅니다. '나 같은 비천한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라고 묻기 시작합니다.
p.127) 주님께 묻고 씨름하여 얻은 은총과, 아무런 질문이나 씨름 없이 받은 은총은 다릅니다. 묻고 씨름한 끝에 얻은 은총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계단입니다. 묻거나 씨름하지 않고 얻은 복은 복 자체일 따름이며 자칫 그 복에 취해 하나님을 놓쳐 버릴 수도 있습니다.
p.135) 믿음으로 산다는 것, 기도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눈앞에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정말로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아직 아무 일도 시작되지 않았지만 마치 이루어진 것처럼 혹은 이루어질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빵이 없으나 빵이 생길 것이라고 확신하고 아이들을 식탁에 앉히는 것이며, 먹을 것이 없으나 곧 생길 것이라고 확신하고 2만 명을 앉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확신이나 미친 행동이 아닌 까닭은, 이 확신 속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믿음대로 이루어집니다.
p.141) 부모나 교사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길러야 하겠습니까? "너희는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자 오늘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오늘을 잘 살아야 내일을 준비할 수 있단다." 이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내일의 가치만을 좇으며 오늘을 사는 삶을 일체 거절하고 오직 공부에만 매진하는 이들은 '똑똑한 탐욕덩이'로 망가질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고요? 공부가 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p.155) 이 목적과 별개로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실 때는 더 중요한 이유가 늘 있었음을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때나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능력을 과시해야 할 때는 오히려 침묵하셨지요. 광야에서 돌로 떡을 만들어보라는 사탄의 요구를 거절하셨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할 때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거절하셨으며, 빌라도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할 때조차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상태나 연약한 인생의 문제를 만나셨을 때, 곧 하나님이 꼭 필요한 상태에서는 참을 수 없는 사랑의 파토스가 터져 나왔고 바로 그때 기적을 일으켜 긍흉을 베푸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고, 12년간 하혈을 해 온 여인이 주님의 필요로 할 때 그의 피가 마르는 기적을 허용하셨습니다.
p.165) 그러나 절망을 통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일상을 다스리는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절망을 통해서 비로소 주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돕니다. 절망이 믿음 안에서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절망에 대답하심으로써 내가 힘없이 지식으로 붙들고 있던 고백에 힘과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p.190)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모든 소유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신부나 수녀들이 받아들이는 수준으로 부담을 느끼면서 드려워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이 내 일상에 찾아오셔서 오늘 요구하는 작은 버림에 대한 촉구르 받아들입시다. 다시 말해 막연하고 거창한 수준으로 버림을 이해해서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오늘 내 삶의 중심에 구체적으로 들어와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자는 것입니다. 크든 작든 말이지요. 설령 작은 수준의 버림일지라도 주님의 요구에 순종하면, 그게 쌓여 나중에 큰 것도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것을 버릴 때 찾아오는 은총과 주님과의 사귐의 기쁨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p.191) 지금 여기에서 잘 내려놓아야 그때가 오면 그때 내려놓아야 할 더 큰 것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내려놓지 않으면서 그날 내려놓을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면 내려놓을 그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p.205) 큰 갈등과 위기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더해 '작은 일 하나도 해결 못하는데 어떻게 세상을 바꾸겠어?'하는 어둠의 속삭임으로 절망할 때,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의 평생에 너를 당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하는 말씀을 주시면 우리는 큰 위로를 맏습니다. 비록 삶에 아무런 변하가 없을지라도 주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실 때 그 자체로 회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p.209)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맡기신 선한 일을 감당하는 것이 삶의 목표라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되 "지금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가던 길을 멈출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맡기신 선한 일을 미래에 감당하기 위해 지금 선한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p.210) 주님이 우리에게 과업을 주신 게 분명하다면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고, 따라서 주님이 반드시 나를 통해 그 일을 이루실 거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길을 가다가 지금 선한 행실과 기여가 요구되는 사건이 나에게 발생하면, 그 앞에서 멈출 줄도 알아야 합니다.
p.213) '네가 지금 이루기 위해 애쓰는 목표가 내가 원해서 시작한 일이 맞니?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일에 집중하거라. 그런데 말이다. 그 일을 하다가 네 양심을 불편하게 하고, 네 일상에서 너를 필요로 하는 살마들이 생기거든, 그들이 네 가족이든 제자든 이웃이든 누구일지라도 네 인생의 시간표가 헝클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네 걸음을 잠시 멈춰도 된단다. 늦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늦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너를 통해 시작한 나의 일을 내가 반드시 이룰 것이기 때문이란다.'
p.224) 행동이 같을지라도 의미와 목적에 따라 선택의 시점은 달라야 했던 것입니다.
p.228)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 존재 이유와 삶의 목적을 분명히 알 때, 우리는 멈출 때와 달려야할 때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무수한 유혹 앞에 넘어지기 십상입니다.
p.230) '주여, 고통받는 사람들이 서 있는 자리에 제가 서겠습니다. 길이 없다고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자리에 제가 서는 것이 올바른 길임을 알고 있습니다. 제 살길을 구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길을 선택하게 하소서, 다만 저에게 바른 때를 선택할 수 있는 분별력을 주셔서, 조바심에 움직이거나 비겁함으로 부르심에 태만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 때에 관한 오늘의 작은 과제 앞에서 좋은 결정을 함으로, 저에게 주어진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사명의 때도 순전한 마음으로 붙들 수 있게 도우소서.'
p.239)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거한다는 말은 그분과 대화하며 사는 삶을 뜻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다는 말은 일요일에 교회에 출석하는 것, 믿기로 한 한 차례의 결단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마음속에 말씀을 품고 묵상하며 그에 근거해 나의 생각을 아룀으로써 예수님과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종교적 의무로 말씀을 보고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보고 기도하며 주님 속에 머물 때 그를 알게 되고 기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p.244) '너희 안에 내가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상태를 뜻합니다. 즉, 예수님과 내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 그의 말씀이 내 판단과 행동의 유일한 기준이 되는 상태, 내 욕망에 휘둘려 살지 않고 자아를 죽이고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그분의 뜻을 추구하며 사는 상태 말입니다.
p.263) 교회 내 사랑은 세상의 사랑 없음과 불의에 항거하기 위한 출발점이지 결코 종착점이 아닙니다.
p.279) 이웃을 위해 불시에 불꽃처럼 자신을 내어주는 삶은 참으로 귀합니다. 그러나 매일 작은 불꽃이 되어 신실하고 꾸준하게 이웃을 위해 사는 삶 또한 귀합니다. 단번에 십자가를 지는 것도 귀하지만, 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미분해서 사는 삶도 아름답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우리는 매일 끊임없이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주다가 죽을 때는 더 이상 나누어 줄 것이 없는 빈 몸으로 주님 앞에 가야 합니다. 저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런 삶을 살다가 자주 넘어지는 것이 주님 앞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p.301)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실패한 후 부활하심으로써 승리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승리를 쟁취하시고 동시에 부활 승리까지 얻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기 백성을 죄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그 자체로 성공입니다. 내세의 유보된 성공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결실을 맺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속이 있는 한 결코 실패는 없습니다. 모두가 실패라고 절망한 십자가가 승리의 사건이요 최후 승리인 부활의 디딤판이었듯이, 우리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대반전의 역사가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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